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책을 내면서
오직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나는 <사랑과 수도의 서간집>이란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나 감동한 나머
지 나도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 서간집은 중세에 실재했던 철학자이며 수도자인 아벨라르와 그의 연인 엘로이즈가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서로 주고 받은 편지로 되어 있다.
고난과 절망을 뛰어넘어 순수한 사랑에 이르는 열정과 고독과 인내의 이 서간집은 읽는 이에게
피 마르는 사랑의 고행을 일깨워 준다. 진실한 사랑이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상승시키는
가 하는 것을 이 책만큼 절실하게 가르쳐 주는 내용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 사랑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엘로이즈가 되어 영원한 연인 아
벨라르에게 고행의 사랑을 고백하기로 했다.
틈틈히 써 모은 이 글은 몇몇 잡지에 연재하기도 했고 또 다른 지면에 일부 수록하기도 했다.
이제 그 전부를 모으고 손질하여 내 사랑의 편지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를 내
놓는다.
다소 시간이 흐른 글이어서 많은 손질을 하고 싶었지만, 이 고백적 편지를 쓸 때의 내 열정과
감동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몇 군데 보완을 했다.
이 책 속에는 많은 사람의 연애 얘기와 문학작품 및 철인들의 말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런 것들
을 통해서 나는 갖가지 사랑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사랑은 언제 어느 시대에나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슬픔과 고통과 행복을 가득히 담고 우리를
손짓하고 있다.
오직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4. 가을
강계순
나, 그대를 만나
사랑은 슬픔으로 시작되고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날 오후, 조금 슬픈 듯한 눈과 따뜻한 미소를 하고 당신은 저만치서 나
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웃고 마시고 떠들고 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당신의 지긋한 미소와 눈은, 그 모
든 소리와 사람들을 차단하고 나를 한 순간 진공 속으로 몰아넣는 듯했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나에게로 왔을까.
햇빛이 부어 내리듯, 꽃들이 눈처럼 내리듯
기도처럼 너에게로 왔을까-
그것을 말해 다오.
하나의 행복이 빛나면서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날개를 크게 펴고
내 불타는 영혼 위에 앉았습니다.
-R.M.릴케의 <사랑의 노래>
햇빛이 반짝이며 내 어깨 위에 내려앉듯이, 봄날 오후 수많은 꽃잎들이 하늘을 덮고 흩날리면
서 쏟아지듯이, 그렇게 사랑은 내게로 왔습니다.
갑자기 세상은 한 개의 금빛 종이 되어 쟁그랑 쟁그랑 노래 부르듯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과 과감하게 결합하는 일이다”라고 어떤 철학자
가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무슨 따뜻한 빛이 나를 감싸는 듯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꼬집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육친을 만
난 것 같은 느낌, 잃어버렸던 나의 일부를 찾아낸 것 같은 안도감이 나의 가슴을 서서히 밀고 올
라와 알 수 없는 충족감으로 나를 설레게 했습니다.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독신의 삶 속에서 일과 성취욕에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여태까지의 나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결핍으로 가득한 것이었던가를 깨닫게 해주었던 그날 오후 당신과의 만남은,
긴 여행의 끝에 도달한 안온한 가정의 평화와도 같은 느낌, 불완전한 외쪽의 바퀴로 타력에 의하
여 마구 달리던 수레가 다른 한쪽의 바퀴를 마저 달고 비로소 안정감을 얻은 것 같은 균형을 몸
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사랑은 운명이라고 흔히 말을 하지요.
나의 이성이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 나의 강한 이기심으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조금씩 나를 해체시키면서 따뜻하게 무너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왔던 나의 에고(ego)와 논리적인 사고, 자기 운명의 열쇠는 자기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철저한 자아가 그렇게도 쉽사리, 그렇게도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대
하여 나의 의지는 강하게 저항해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동안, 내 속에는 어이없게도 따뜻한 기쁨
이 움트고 있음을, 끝없는 평화가 내 가슴을 채워가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나는 이상한 행복감으
로 울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온화한 미소와 조금 쓸쓸한 듯한 분위기를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옷은 엷은 갈색과 진한 갈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귀밑에는 몇 올 쯤
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흩날리듯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하면서
웃던 당신의 얼굴은 무언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습
니다.

현세의 욕망이나 이해타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넉넉하고 자유로운 당신의 분위기,
마치 목적없이 떠도는 여행자와도 같이 보이는 당신의 조금 허탈한 눈, 내성적이고 세심하게 보
이는 당신의 손놀림, 한동안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건너다보고 있던 당신의 눈빛 속에
서 나는 나의 운명이 나래를 펴고 나의 몸 위로 내려앉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아벨라르.
그리하여 하나의 행복이 내 불타는 영혼 위로 내려앉았고 `정교한 조직의 이국 산물`과도 같은
사랑의 신비가 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당신은 먼 이국에서 오셨고, 또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잠깐 머물렀다 떠나갈
당신이 내게 새롭게 발견된 또 하나의 `나 자신`인 것을 깨달은 그 날 오후, 한 몸의 연인을 반으
로 나누어 세상의 끝과 끝으로 던져 놓았다는 짖궂은 신화 속의 `베터하프(Better half)`를 상기했
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미소, 당신의 옷깃이 닿은 의자와 식탁의 모서리, 당신이 잡은
술잔에 이르기까지 내 관심의 촉각은 예민하게 일어서서 그 모두를 나의 눈과 귀 속에 생생하게
각인했고,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소리는 한 음계 높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빛깔은 은
빛 혹은 금빛으로 채색되었으며, 그 향기는 어찌 그리도 감미롭게 나를 감싸고 말았던지요?
뜰안의 나무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조용히 그 키를 키워가고 나무들 너머로 바라보이는 하늘
에는 엷은 봄날의 아지랑이가 눈물 같이 어룽이었습니다.
아벨라르.
다시 한번 인생을 시작해 보고 싶은 열망이, 그것을 위하여는 그 무엇이라도 지불하고 싶은 열
정이 내 몸 속에서 강하게 피돌기를 시작한 그날 오후, 나는 기쁨보다는 더 많이 슬픔 쪽에 서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갖고 있는 성질 속에는 기쁨과 환희도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고통과 인내도 더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또 사랑이라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얼
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를 겪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자아를 희생해야 하는지를 나는 알고 있으므
로, 그리고 당신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아벨라르, 내
사랑은 슬픔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슬픔의 다른 한쪽에서 다스릴 수 없이 솟아오르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 반짝이는 미소, 세상이 온통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율동감이 스스로를 가눌
수 없게 하던 저 불가해한 봄날 오후의 한때를, 나는 내게 내려주신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반생의 어둠을 밀어내고 빛처럼 내게로 오신 이, 세상의 온갖 사물과 냄새, 그 리듬을 바로
감각하고, 생의 곳곳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바로 이해하도록 해주신 이, 그리고 긴 밤을 눈 떠
서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알게 해주신 이, 나의 아벨라르여.
사랑은 내게 기도처럼 왔습니다.
내 영혼을 깊이 울리면서 천상의 어느 곳을 향하여 손 모으고 무릎 꿇게 하는 겸손하고 맑은
기도처럼 그렇게 내게로 왔습니다.
내가 이 대지 위에 밭 붙이고 살고 있음을 감사하고 나의 영혼이 그리움의 고통으로 닳아가고
있음을 또한 감사하는 순정한 기도처럼 와서, 나뭇잎 하나에도 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시인 릴
케(Reiner Maria Rillke, 1875~1926, 독일)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아벨라르.
나의 기도가 당신을 지켜, 생애의 어느 하루도 어두운 날이 없기를, 다만 행복하고 사랑에 가득
하기를 이 밤도 빌겠습니다.
당신이란 의미
세상의 많은 사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내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이나 사물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고 어떤 `의미`가 됩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이름은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는 기호에 지나지 않
을 뿐 특별한 뜻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나의 연인`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보편적인 이름이 아니고 나의 운명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특별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아벨라르.
당신은 나의 눈 속에, 마음 속에, 운명 속에 이미 분명한 하나의 존재로서 꽃 피기 시작했습니
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의 사고, 나
의 능력, 나의 시각, 나의 가치 기준 그리고 나의 생명, 그 자체에조차 깊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색깔, 다른 향기, 다른 목적으로 바뀌어졌
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의하여 깊이 영향받고, 그 생활의 설계를 바꾸고, 어떤 것을 꿈꾸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가 세상에 태어난 몫을 충분히 하게 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
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치루어야만 되는 어떤 것 -비속함을 초월하고 숭고하게 되는 것, 위대
한 것에 대한 헌신, 뜨거운 심장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을 치루기 위하여 당신은 내
게로 보내어진 사람입니다. 말로써가 아니고 가슴과 행위로, 안락과 휴식으로써만이 아니라 고뇌
와 투쟁으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은, 그것을 통하여 내 영혼이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작
용을 하게 해줍니다.
세상의 공리로부터, 타산으로부터, 이기심으로부터 나를 떼어내어 맑고 높은 어느 곳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당신의 의미는, 마치 부싯돌끼리 강렬하게 부딪쳐 캄캄한 어둠을 한 순간 밝히고 그
불씨를 딴 곳으로까지 옮기는 일만큼이나 빛나는 무엇입니다.
아벨라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지만 당신과의 만남처럼 강한 힘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 만
남, 기쁨과 고통의 극단까지 오가게 하는 만남이 또 있을까요?
아, 당신에게 가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요.
당신에 내게로 와서 이렇게도 큰 기쁨, 이렇게도 큰 희망, 그리고 이렇게도 큰 그리움과 슬픔이
되는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로 가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무엇이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로 가서 가장 큰 기쁨과 위로, 최후에 나의 생명을 그것과 바꿀 가장 큰 사랑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아벨라르.
이 기쁨과 설레임은 나의 꿈 속에조차 따라와 긴 밤의 어둠을 물리칩니다.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내려서면 상쾌하게 발목을 적시는 풀잎 위의 이슬들처럼 나의 육신과 영혼
을 맑게 적셔 줍니다.
이슬들이 이토록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을, 새벽 바람이 이토록 맑은 향기를 품고 있는 것을, 세
계가 이토록 내게 잘 어울리는 한벌의 옷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을, 예전에 나는 미처 경험하
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향해 열린 창을 통하여 세계를 내다보고,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세계를 알고, 당신의 눈
과 마음을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이 사랑의 신비한 감옥 안에서 아벨라르, 나의 삶은 마치 잘
익은 빵처럼 부풀고 감미로워, 나는 당신을 위하여 알뜰하고 깨끗한 식탁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신부가 됩니다.
아벨라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름, 특별한 향기로 나를 불러 주십시오.
나의 식탁으로 와서 정성들여 마련한 이 양식을 같이 나누고 붉게 익은 포도주를 따루어 다시
시작하는 나의 삶을 위하여 조용히 잔을 들어 주십시오.
같은 살 같은 영혼

아벨라르.
당신은 무용의 천재, 이사도라 던컨의 생애를 읽어 보셨겠지요. 본능과 직관이 시키는 대로 삶
의 리듬을 춤추다가 간 던컨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과 예술의 대립, 서로 융화하기 힘들며 둘 다
매우 강한 힘으로 한 사람의 생명력 전부를 요구하는 절대의 소명, 그것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내 삶은 오직 두 개의 동기를 갖고 있다. -즉 사랑과 예술이 그것인데, 사랑은 때때로 예술을
파괴했고 예술의 전제적 소명은 사랑에 비극적 종말을 가져왔다. 이 둘은 어울리지 못하며 끊임
없이 싸울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도 그것을 위해 전부를 요구하고 예술도 그것을 위해 전부를 요
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춤을 추면서 살다 간 무용의 천재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1927, 미국)은 그
의 자서전에서 위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던컨은 여러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기는 했지만, 남자의 곁에 안주하여 단순히 한 여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죽을 때까지 그는 자연과 그의 직관, 그리고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리듬을 춤추다
가 떠난 무용가였습니다.
그는 감사하거나 숭배하는 많은 예술가들 앞에서 춤을 춤으로써 그의 마음을 표현했고, 자유로
운 영혼과 빛나는 천재로서 한 시대를 춤추다가 갔습니다.
그는 고든 크레이그라는 젊은 무대 예술가를 만나서 “그에게서 나의 살과 같은 살을 만났고,
내 피와 같은 피를 만났다. 이것은 영혼끼리의 만남이었다”라고 감동하여,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사랑을 나누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제각기 자기의 일이 사랑 때문에 방해받
고 지연되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와 함께 사는 것은 그의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마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랑과 에술은 둘 다 그 사람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생명의 전부를 거기에 집중하고 걸지 않으면 안되는 전제적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흔히 사랑을, 그 창조력의 촉발제로써나 혹은 윤활제로써만 갖는 수가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정열은 창작생활에 빼
놓을 수 없는 강한 힘을 부여하므로 에술가의 생애에는 많은 사랑의 얘기가 따라다닙니다. 그러
나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의 소명이 사랑보다는 예술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비단 예술가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주 범속한 생활인에게도 `일`이란 그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와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일을 가지고 있는 연인들의 사랑이 불행하게 끝나 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땍쥐베리(Antoinc de Saint-Exupery, 1900~1944, 프랑스의 작가)가 사랑에 대하여 정의하기
를, “사랑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것
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사랑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동화`의 감정과 `전제적 힘`을 가리킨 것
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성질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일 속에서 부단히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들의 일과
사랑을 함께 키워 갈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끼리는 서로 동화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지요.
아벨라르.
나는 이미 당신과 동화하기로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당신의 일과 나의 일은 사실상 거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혹시 전생에서 우리는 오누이로 살지는 않았을까 의심할 만큼 나와 같은 피, 같
은 성품, 같은 취미, 같은 영혼을 당신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상적 반려자로서의 당신에게 나의 일, 나의 사랑, 모든 것을 주어도 결코 아깝
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주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곧 당신도 함께 느끼며, 내가 즐거운 일은 곧 당신에게도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의 오랜 방황은 이제 끝났습니다. 일과 함께 사랑을, 사랑과 함께 일
을 키워갈 때 배가되는 기쁨 속에서, 나는 무엇에고 감사하며 언제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당당하
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자매혼`으로 얽힌 사람들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들이므로 어떤
고난이 닥쳐오고 어떤 좌절이 온다 해도 당신과 나의 `본질로서의 맺음`은 결코 끊기지 않을 것
이라 믿습니다.
운명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소중한 만남을 어떻게 키우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 일과 사랑을 어
떻게 조화시키며 삶의 결실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난한 과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생각, 같은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을 믿기에, 나는 내 미래의 열쇠를
당신에게 모두 맡깁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아벨라르.
당신은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을 알고 계시지요.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여류시인 이영도에게 무려 5천여통의 사랑의 편지를 띄었고, 그가 작고한 후 그 편지는 이영도의
손에 의하여 책으로 엮어져 나와, 그 아름답고 절절한 편지 구절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널리 읽
혀졌습니다.
그 시절의 이영도를 가까이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나도, 그의 청초하고 수심어린 외모에
은연중 이끌렸던 적이 있습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
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던 상당한 미인이
었습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 입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
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
었습니다.
청마의 편지는 마치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리리시즘(Lyricism)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
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묶
여져, 그 수익은 이영도의 뜻에 따라 후진 양성을 위한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희사된, 청마의 연
애편지 중 한 편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두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더듬으며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한번
새겨 보면서 나의 사랑도 언제까지나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
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
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아벨라르. 이토록 애타게 울부짖는 청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이
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와 하던 청마,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손에
잡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 썼지요.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중에서
청마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달려서 단 한두 시간을 이영도를 만나기 위하여, 그의
휴일을 온통 다 써 버렸던 정열의 시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길들은 잘 포장되어 있지 않
았고, 버스는 느리기만 했습니다. 서로 다른 지방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던 청마와 이영도는 일요
일이나 공휴일에 주어진 시간을 오직 서로 만나는 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먼 길을 하루 종일
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조금도 괴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도덕적인 제약과 한국적 모럴 때
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 성상처럼 모셔놓고 살았습니다. 이미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사랑은 후배를 키우는 확실한 결실로
서, 해마다 몇 사람씩 이 땅을 밝히는 시인으로 태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토록 세상을 밝게 비추는 촛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깊고 아득한
의미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아벨라르.
다시 나는 청마의 시를 빌어서 나의 그리움을 당신께 보냅니다.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유치환 <그리움> 중에서
나의 닻을 내리고
아벨라르.
흔히 사랑을 환상이라고들 말합니다. 사람마다 그 마음 속에는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사랑에 대
한 환상이 있어서,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현실 속의 어떤 순간에 신기루처럼 나타나 영혼
을 사로잡고, 일종의 도취 상태를 빚는 것이 사랑이라고들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적 남성 혹은 여성상을 마음 속에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가 어느날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의 얼굴을 그 사람에게
씌워 놓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현실 속에 있는 상대의 실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꿈꾸어 온 사랑의 환영을 사랑하
는 것이 보편적인 사랑의 시작이라고들 하지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 가는 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단점이 발견되고, 자기가 생각해 온
이상적 인간형에서는 거리가 먼 결함 투성이인 현실 속의 인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이는 실망과 환멸로 그 사랑의 막을 내리고, 다시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의 사람을 찾아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벨라르.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방황이 끝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영화 속에서, 혹은 비극적인 소설 속에서, 또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수없이 스
치고 간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처럼 찾아 헤매던 나의 사랑이 당신을 통하여 비로소 현신해 왔
고, 나는 이제 나의 닻을 내리고 당신 곁에 정박하려 합니다.
환영이 아닌 실재하는 사랑으로서의 당신을 나는 가슴 가득히 껴안고, 이 사랑을 키우고 가꾸
어 갈 것입니다.
당신의 단점이나 결함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맹목을 축복해 주십시오.
타인의 눈에는 단점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내게는 소중하고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랑을 축
복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결함이 있다면 나의 노력으로 그것을 보완하며, 또 나의 결함을 당신으로부터 보완
받으며 나는 이 삶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랑을 지킬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가꾸고 키워 나가고자 하는 이 귀한 의지를 환상을 찾아 헤매는 도로에다 어
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유일하며 가장 밝고 높은 촛대로서 내 속에 계십니다.
우리의 고려가요 중에는 그의 님을 가장 높고 귀한 존재로 비유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월 보로매
아으 노피 현 등불 다호라
만인 비취실 즈이샷다.
(2월 보름에
아, 높이 켠 등불 같아라
만인을 비추실 얼굴이어라)
삼월 나며 개한
아으 만춘 들 욋고지여
느미 브롤 즈을 디녀 나샷다
(3우러 지나면서 핀
아, 늦은 봄달 오얏꽃이여
남들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나셨도다)
고려의 여인은 그의 님을 이토록 높이 칭송하며 기리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님은 어느 때고 등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봅니
다.
자기의 님이 혼자만 우르러 보는 사람이 아니고 `만인을 비추실 얼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는 마음, 혼자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는 얼굴이 아니고, `만인이 부러워할 모습`임을 흐뭇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에게 칭송을 들을 때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만큼 으쓱하고 자랑스러운
기분, 언제나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상대를 아끼
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심정입니까.
만인을 비출 등불과 같은 모습으로, 만인이 부러워할 의젓한 모습으로 그의 연인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는 자는 복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벨라르.
사랑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느 시대고 같
은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시나 노래 등 많은 작품과 일화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
다.
머언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고, 사랑의 사건이 없
었던 시대가 없었으며, 오늘날처럼 삭막한 시대에서조차도 사랑은 아름답고 지고한 것으로 사람
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음을 볼 때, 인간이 그 생존을 지속하는 한 결코 사랑은 소멸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를 니지고 있는 듯합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사는 것을 배우는 일`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에 나는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아벨라르.
사랑을 통하여 진실하게 사는 법, 충만하게 사는 법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
를 비춰 주고 인도하며 깨닫게 함으로써 `2월 보름에 높이 켠 등불 같이`, 어둠 속에서도 내가 당
신을 우러르며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높이 떠 계십니다.
나의 전부를 던져
나는 가끔 당신에게서 떠도는 사람의 고적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언지 한 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허전한 분위기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
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을까를 때때로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 나라와는 아주 이질적인 유럽의 한 나라에서 성장했고, 거기에서 공부와 일
을 했으며, 그 나라에 적응하여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인의 피가, 그 나라 사람들과는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어떤, 극히 작으면서도 극히 절실한
무엇으로서 당신의 가슴 속에 자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서양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양인으로서의 유전인
자가 당신의 몸 속에서 결코 서양의 문물이나 풍습과 융화되지 않는 갈등으로 서서히 자라 드디
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고향인 이 나라를 자주 찾게 했고, 이 나라에서 뿌리내리고 싶다는
소망으로 피어났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당신은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마치 코스모폴리턴과도 같은 묘한 분위기를 갖고 계
시고, 그것이 당신을 늘 쓸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확실한 소속이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의미도 되지만, 자유란 사실상 매우 고독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예속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친구에, 가족에, 일에,
사상에, 나아가서 특정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므로써 인간은 비로소 편안해지는 법입니다.
자기가 설 자리,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과 이웃, 자기가 아니면 안되는 어떤 상황이 한 사람을
당당하게 만들고 생동감 있는 결단과 추진력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고국에 머무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과, 당신이 살아온 그 나라로 돌아가야
만 편안해지는 당신의 생활습성과의 괴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와 하고 있습니다. 또 당신은
당신의 생활을 뒷받침하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엮어 주고 있는 당신의 아내-아름답고 성실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당신 속에 흐르고 있는 피와는 전혀 다른 피를 갖고 있는 이국 태생의 여자와,
당신과 같은 피, 같은 채취, 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는 나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어제 당신은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꿈꾸어 온 여자란 독립적이고 합리적이며 행동적인 여자가 아니고, 남자의 사랑 속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을 줄 알며, 남자의 뜻에 조용히 따라올 줄 아는 그런 동양적 여성이었어요. 동
양의 여성은 무언가 모성적인 힘이 강하게 돋보이고, 남편에게도 거의 모성적 사랑을 쏟을 줄 아
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당신은, 일반적인 한국 여자들에 비해 매우 개성이 강하고 지적이며, 사
고방식조차도 아주 진취적이고 서구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내게는 당신 속에 있는 동양 여성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순정적이고 복종할 줄 알며 상대의 마음의 변화에 예민하게 신경을 써주는
자상하고 다뜻한 모성적인 애정의 원천이 아주 깊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여요.
아마 그런 점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부분인지도 몰라요.
나는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여성에게서, 내 마음의 아주 섬세한 변화에도 마음을 써 주고 나를
보호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싶어하는 여자를 한번도 발견하지 못해 왔어요. 그것이 늘 내게는 어떤
상실감을 주어 왔거든요. 나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갖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신에
게는 나의 어머니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요. 나는 이제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요. 나의
상실감이 비로소 채워지는 것 같은-.“
아벨라르.
당신의 긴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남자가 원하고 있는 여자란 어떤 여자인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신만만하고 당돌하며 유능하고 적극적인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예속될 줄 알고 섬세한 마음
씨와 헌신의 정신을 가진 여자, 사랑과 감사로 충만된 여자를 남자들은 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
찌 보면 그것은 남자들의 독선과 지배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할 수도 있는 성질의 요구 조건
이지만, 또 그런 반박이 `우먼리브(Woman lberation)` 물결의 원천을 이루기도 했지만, 나는 당신
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비록 독신으로서 일에 열중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여자이긴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근
원적인 차이점을 인정하는 쪽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같은 별 아래 태어난 두 개의 얼굴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 우월하지
도, 열등하지도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운명이며, 남
성은 남성 특유의 강인함과 꿈으로, 여성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충분한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
고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록 사회에서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고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남성
이 여성이 될 수 없으며, 여성이 남성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능력에 있어서 남녀의 우열의 차이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일
을 떠나서 개인적인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며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당신은 다시 나에게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싶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일
`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강한 힘에 이끌려 그것에 전념하는 기쁨, 하고자 하는 일을 달성하고야
마는 일종의 성취욕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어쩌면 자신의 본질 속에 있는 여성적 열망을 굳이 외면하고, 그것과 대립되는 `일`에 대
한 열망만을 불 태우며 불완전한 삶을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만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내 속에 얼마나 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 내재해 있었는지를 나는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늘 나를 허전하고 방황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비로소 확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
다.
그리하여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가장 부드럽고 온전한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나의 여성 전부를 당신에게 던져, 내 생애를 온전하고 균형 잡힌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비중이란, 어쩌면 위대한 업적이나 공로에 의해서 가늠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얼마나 크고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가늠될 성질의 것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당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또 당신의 생애에 깊이 작용하면서 성장해 가는 내 삶을 가
장 높은 보람으로 알고 거기에 맞추어 내 삶을 다시 설계하려 합니다.
눈물과 함께 나의 그리움이
아벨라르.
참 이상한 변화가 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일에는 무엇이나 아주 단순한 감정으로 몰입하게 되고, 또 자주 눈물을 흘리거
나 서러워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여도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나 자신의 이런 변화에 스스
로도 놀라서 나는 당황해집니다.
사랑이란 사람을 이렇게도 단순하게 만들고 따뜻하게 만들어 사소한 일에도 곧잘 울게 하는 신
비한 힘을 가진 것인가 봅니다.
나는 문득 작가 이효석의 편지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1907년 강원도의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1942년 서른 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 이효석은 심미
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작가로, 특히 그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낭만적이며 페미니스트였던 그는 많은 사랑의 편지를 썼을 것으로 짐작되나, 남
아서 전해 오는 편지는 한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편의 편지를 통해서도 이효석의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씨,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
연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그 섬세하고 잔잔한 자연의 묘사를 그의 사랑의 편지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어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수필을 읽는 듯합니다.
그렇게도 여리고 고운 이효석도 사랑의 열정에 몸부림치며 괴로와했던 것을 보면서, 사랑의 불
가항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을. 가까워 오는 가을! 아름답게 빛나면서는 안타깝게 뼈를 찌르는 가을. 새어 드는
가을과 함께 그대를 그리워하는 회포가 얼마나 나의 간장을 찌를까를 나는 겁내는 것이오. 물드
는 나뭇잎도 요란한 벌레소리도 그대의 자태가 내 곁에 없고야 무슨 값있는 것이겠소. 나는 그대
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그리워한 적은 한번도 없었소. 벌레소리 그친 찬 새벽 침대 위에서 눈
을 뜬 채 나는 필연코 울 것이오. 자칫하다가는 어린애 같이 엉엉 울 것이오. 이 큰 어린아이를
달래줄 어머니는 세상에 없을 법하오. 사랑은 만족을 모르는 바다와도 같다고 할까. 가령 나는 진
달래꽃을 잘강잘강 씹듯이 그대를 먹어 버린다 하여도 오히려 차지 못할 것이며 사랑은 안타깝고
아름답고 슬픈 것. 아름다우니까 슬픈 것. 슬프리 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오, 아
름다운 정을 못 잊어서지요. 사랑 앞에 목숨이란 다 무엇하자는 것일까. 욕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
격이 일찍이 사랑의 감동을 넘을 때가 있었던가! 나는 사랑 때문이라면 이 몸이 타서 금시에 재
가 되어 버린다 하여도 겁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원하고자 하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태우소서. 깨뜨리소서. 와싹 부셔 버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
게 빛날 것인가!
- 이효석으로부터 XX에게